성경 속 사무엘의 인생은 이스라엘 민족의 중요한 전환기를 관통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는 사사 시대의 마지막 인물이자, 선지자·제사장·통치자 역할을 동시에 수행한 다면적 인물이다. 사무엘이 활동하던 시대는 정치적으로 혼란하고, 영적으로 암흑기였다. 하지만 그 속에서 하나님은 사무엘을 부르시고, 말씀을 회복시키며, 새로운 시대인 왕정 시대로 전환하는 일에 중심으로 사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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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상 12장 23절은 이러한 배경 가운데 등장하는 매우 중요한 구절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이라는 이 말씀은 단순한 기도의 결심을 넘어, 한 시대를 마무리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지도자가 백성 앞에서 남기는 중보자의 유언과도 같다.
그렇다면 이 말씀은 어떤 상황에서 선포된 것일까? 배경은 사무엘상 8장에서 시작된다. 사무엘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그의 두 아들이 판결을 맡았지만 공정하지 못했다. 이스라엘 장로들은 이를 핑계 삼아 사무엘에게 찾아와 “우리에게도 왕을 세워 주십시오.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도 왕이 필요합니다”라고 요구한다. 이 요청은 단순히 정치 제도를 바꾸고자 하는 요구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들이 너를 버림이 아니요, 나를 버려 자기들의 왕이 되지 못하게 함이니라”(삼상 8:7). 이것은 백성들의 요구가 신정통치에 대한 거부이며, 눈에 보이는 인간 왕을 신뢰하겠다는 믿음의 붕괴를 뜻했다.
하나님은 백성의 요구를 받아들이되, 왕정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를 미리 경고하라고 사무엘에게 지시하신다. 이에 따라 사무엘은 “너희가 왕을 원하면, 그는 너희 아들들을 군대로 징집하고, 세금과 노역을 부과할 것이며, 결국 너희는 그 왕 때문에 부르짖게 될 것이다”라고 경고한다(삼상 8:11–18). 그럼에도 백성은 고집하며 “우리에게 왕을 세워주십시오”라고 반복한다. 이 장면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보다 제도를 더 신뢰하고, 믿음보다 형식을 선택하는 모습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사울을 왕으로 세우시고,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을 부으며 이스라엘 역사상 최초의 왕정 시대가 열리게 된다. 이후 백성들은 사무엘과 사울과 함께 길갈에 모여 하나님 앞에서 왕의 즉위를 공식적으로 확정짓는 언약 갱신 의식을 진행한다. 바로 이 자리가 사무엘상 12장의 무대이다.
이 장은 사무엘의 고별 설교이자, 왕정 도입에 따른 신학적 정비 선언문이다. 사무엘은 먼저 자신의 지도자적 삶을 되돌아보며, “내가 누구의 소를 빼앗았느냐? 누구의 재물을 탈취했느냐? 누구에게 뇌물을 받았느냐?”라고 묻는다(삼상 12:3). 백성들은 일제히 “아닙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한다. 사무엘은 자신이 지도자로서 도덕적 정결성과 신실함을 지켰음을 증명한 후, 이스라엘의 역사를 회고하며 하나님께서 어떻게 이 백성을 애굽에서 이끌어 내셨는지, 광야에서 돌보셨는지를 차근차근 되짚어준다. 이는 백성들이 인간 왕을 요구하기 이전에, 이미 자신들의 진짜 왕이신 하나님이 어떤 분이셨는지를 상기시키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사무엘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백성들의 죄를 드러내는 사건 하나를 요청한다. 바로 밀 추수기라는 가장 건조한 계절에 하나님께서 천둥과 비를 보내시도록 기도한다. 하나님은 응답하셨고, 하늘에서는 천둥이 울리고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 초자연적 현상을 목격한 백성들은 비로소 두려움에 휩싸이며 “당신이 우리를 위해 여호와께 기도해 주십시오. 우리가 죽을까 두렵습니다. 우리가 왕을 요구한 것은 큰 죄였습니다”라고 회개한다(삼상 12:19).
바로 그때 사무엘이 선포한 말씀이 사무엘상 12장 23절이다.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이 말씀은 중보기도의 본질과 선지자의 책임을 동시에 담고 있다. 사무엘은 비록 백성들이 죄를 지었고, 자신의 권위를 저버렸을지라도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고 단언한다. 이는 선지자가 단지 미래를 예언하는 존재가 아니라, 백성을 위해 끊임없이 하나님 앞에 서야 하는 중보자임을 의미한다. 또한 그는 “선하고 의로운 길을 가르칠 것”이라고 말하며, 지도자의 두 번째 사명은 진리를 가르치는 일임을 선언한다.
이 장면은 왕이 세워졌다고 해서 하나님의 백성의 정체성이 바뀌는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왕은 있어도, 여전히 하나님이 이 백성의 진정한 통치자이시며, 사무엘은 그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서 기도와 말씀으로 다리를 놓는 역할을 계속 수행하겠다는 것이다.
사무엘의 이 고백은 오늘날의 교회와 신앙 공동체에도 강력한 도전을 던진다. 기도하지 않는 것은 단순한 태만이 아니라 관계 단절이요, 하나님 앞에서의 죄라는 선언은, 중보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다시금 일깨운다. 지도자든 평신도든, 우리가 맡은 사람들을 위해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이야말로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동역의 삶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