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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n You Truly Believe in the Risen Christ”

by coven21 2025. 1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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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의 진짜 의미

기도를 해본 적이 있는가? 아니면, 이렇게 물어보자. 간절히 원하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것을 하늘에 의지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람들은 대개 절박해질 때 신을 찾는다. 시험을 앞둔 수험생이, 병원 침대 위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환자가, 모든 걸 잃고 절망에 빠진 사업가가 그렇게 한다. 하지만 진짜 중요한 질문은 이거다. 기도하면 응답이 오는가?

 

이 질문은 단순해 보이지만, 인생 전체를 통째로 담고 있는 질문이다. 만약 이 질문에 "예"라고 확신할 수 있다면, 인생의 문제는 거의 절반 이상 해결된 거나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그 말은, 이 세상 너머에 어떤 존재가 실제로 존재하며, 그 존재가 당신의 인생에 개입하고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이보다 더 강력한 힘이 있을까?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대답을 못한다. “기도를 해도 아무 일도 안 일어나던데요?” “그건 종교인들의 자기위안이잖아요.” 이렇게 회의적인 반응이 돌아온다. 그리고 그 말도 맞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기도하고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고 느낀다. 그건 기도를 잘못 배웠기 때문이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기도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하는 기도다. 그냥 막연한 대상에게 “도와주세요”라고 말하는 게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것이다. 그건 단순한 종교적 문구가 아니다. 그 이름 자체가 시스템이고, 힘이며, 응답의 키다. 이건 단순히 교회에서 배우는 교리의 차원이 아니다. 일종의 우주적 원리다.

 

마태복음 28장을 보자. 예수는 부활하신 뒤 제자들에게 마지막 명령을 남긴다.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겠다는 약속. 단순한 위로가 아니다. 부활하신 존재가 함께한다는 것, 이건 완전히 게임 체인저다. 어떤 문제든 상관없다. 살아 있는 존재가, 나보다 높은 차원의 존재가 함께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인간은 어떤 상황도 버틸 수 있다.

 

마가복음 16장에서는 더 구체적이다.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리라.” 이건 은유가 아니다. 직접적인 능력이다. 여기서 말하는 '내 이름'은 단순한 기호가 아니라, 권위의 상징이다. 예를 들어보자. 대한민국 대통령의 사인이 찍힌 문서가 있다고 치자. 아무 종이쪼가리 하나가 아니라, 그것은 법적 효력을 갖는 '명령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은 그런 권위다.

당신이 이 이름을 사용할 수 있다면? 즉, 이 시스템에 접속할 수 있다면? 게임은 끝난 것이다.

 

다시 오실 그리스도, 언약을 붙잡는 자의 태도

사람은 본질적으로 미래를 두려워한다. 죽음을 두려워하고, 내일을 불안해한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이 미래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말한다. “그가 다시 오시리라.” 사도행전 1장에서 천사는 이렇게 선언한다. "너희가 본 그대로 다시 오시리라." 상징이 아니다. 실제 사건이다. 역사 속에 존재했던 예수가 다시 온다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단순히 ‘언젠가 다시 온다’는 예언이 아니다. 그 언약을 붙잡은 사람들의 태도 변화다. 사도행전 1장 14절을 보면 그들은 ‘마음을 같이하여 오로지 기도에 힘쓰니라’고 기록돼 있다. 세상의 어떤 것도 확실하지 않다는 걸 깨달은 사람은, 결국 확실한 약속 하나에 인생을 거는 법이다.

 

그들은 실제로 그 언약을 붙잡았다. 그리고 결과는 어땠는가? 사도행전 2장을 보면 알 수 있다. 역사상 가장 강력한 응답, 마가다락방의 사건이 터진다. 이것은 단순히 "방언을 했다"는 초자연적 사건이 아니다. 인간이 인간의 능력으로는 절대 도달할 수 없는 수준의 집중, 연합, 에너지, 변화를 체험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신기루’가 아니다. 시스템이다. 어떤 시스템이냐고?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언약을 붙잡고, 오로지 기도에 힘쓰는 사람에게 응답이 임하는 시스템. 이건 마치 220볼트에 플러그를 꽂으면 전기가 들어오는 원리와 같다.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건 초대교회 시대에나 가능한 일이야.”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시스템을 오프라인으로 만드는 것이다.

 

심판주로서의 그리스도와 '영원'의 본질

 

당신은 스스로를 '유한한 존재'라고 생각하는가? 보통은 그렇다. 사람은 80세, 90세면 죽는다. 그러니 인생은 짧고, 죽으면 끝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기독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한다. “사람은 영원히 존재한다.” 육신은 죽지만, 영은 사라지지 않는다. 만약 이 말이 진짜라면, 우리는 완전히 잘못된 기준으로 살아온 것이다.

 

계시록 20장은 이렇게 말한다. 심판주로서의 그리스도가 오셔서, 인생의 최종 결과를 심판하신다. 모든 행위와 이름이 생명책에 기록되어 있다. 사람들은 흔히 심판이라는 단어에 거부감을 갖는다. 하지만 생각해 보라. 심판이 없다면, 이 세상의 악과 불의는 영원히 지속된다. 심판이 있기에, 정의는 완성된다.

 

그리고 계시록 21장, “새 하늘과 새 땅”이 나타난다. 이것은 낙관주의적 허상이 아니다. 현재의 세상 시스템이 끝나고, 완전히 다른 질서가 시작된다는 선언이다. 그 질서 안에서는 슬픔도, 눈물도, 질병도 없다. 인간이 본능적으로 갈망하던 이상향이 드디어 실현되는 것이다.


사탄은 어떻게 당신을 속이는가

이 모든 이야기가 믿어지고, 확신되고, 내 것이 되는 순간, 인간은 사탄에게 속지 않게 된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예수는 말한다. “그는 처음부터 거짓말쟁이요, 속이는 자다.” 사탄은 무서운 얼굴로 나타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도 그럴듯한 말, 너무도 그럴듯한 상황으로 나타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그래, 너 종교 가져. 믿어. 그런데 그리스도만은 누리지 마.” 이게 핵심이다. 사탄은 당신이 부자가 되는 것, 건강해지는 것, 좋은 인간관계를 맺는 것을 막지 않는다. 단 하나, 그리스도라는 시스템에 접속하는 것만은 방해한다.

 

이건 단순한 종교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원리이자 통찰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끝났다고 선언할 수 있는 사람만이 진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그 외의 모든 자유는 조건부다. 돈이 있으면 자유롭고, 건강하면 자유롭고, 사랑받으면 자유롭다. 하지만 이것들은 언제든 무너질 수 있다.


결론: 본질을 보라, 속지 말라

당신이 지금 무엇에 집중하고 있는지를 보라. 문제가 아니라 본질을 보라. 사람들은 일 중심으로 사고한다. 눈앞의 문제에만 몰두한다. 하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진짜 능력은, 본질을 꿰뚫는 힘이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사실상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끝났다고 선언한다면? 그건 믿음이 아니라 선언이다.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도 있다. 괜찮다. 중요한 건 '결국' 어디에 도달하느냐다.

당신이 그리스도의 사람이 되었다면, 그건 성령으로 인쳐졌다는 증거다. 그 말은, 더 이상 속지 않는다는 뜻이다. 세상에, 사탄에게, 환경에. 변화하지 않는 본질에 집중할 때, 변화는 저절로 따라온다.



기도하면 응답이 오는가? 응답은 온다. 단,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할 때.
그는 부활하셨고, 다시 오실 것이며, 심판주로서 영원을 다스리신다.
이 모든 것이 믿어지고, 내 삶에 연결될 때, 그리스도를 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순간, 사탄은 무릎 꿇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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