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대부분 기도를 자기 문제 해결의 도구로 사용합니다. 건강, 자녀, 돈, 성공. 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중보기도는 전혀 다릅니다. 그것은 내가 드러나는 기도가 아니라, 오히려 내가 지워지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는 길에 여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이 말은 단순히 눈물 흘리라는 뜻이 아닙니다. 아벨의 피처럼, 죽어도 멈추지 않는 핏소리의 호소를 말합니다.
창세기에서 가인이 아벨을 죽였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네 아우의 피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아벨은 죽었지만, 그의 피는 여전히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를 이렇게 증언합니다.
“아벨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 결국 아벨의 기도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생명을 건 호소였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중보기도는 ‘핏소리의 기도’여야 할까요?
세상의 문화를 따라 살고, 사탄과 운명에 묶여 허망하게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을 떠올려보면 됩니다. 이것이 단순한 삶의 문제가 아니라 영적 비극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결코 가만히 있을 수 없습니다. 분노와 원통함으로 싸워야 할 싸움이 바로 영적 전쟁이며, 그 전쟁의 무기가 중보기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아벨의 피보다 더 나은 것을 말한다고 히브리서는 기록합니다.
예수의 피는 단순히 죄 사함을 넘어, 지금도 호소하는 피입니다. 그렇기에 중보기도는 반드시 피가 뿌려지는 기도여야 합니다. 감정의 눈물이 아니라, 생명을 건 기도여야 합니다.
실제로 사도행전에서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을 때, 교회가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천사를 보내 헤롯의 권세에서 그를 건져내셨습니다. 이것이 중보기도의 실제 역사입니다. 절대불가능한 상황에서도, 절대가능한 역사가 일어나는 기도의 능력입니다.
결국 문제는 나에게 돌아옵니다.
나는 어떤 기도를 하고 있는가?
여전히 자기 문제 해결에만 매달리고 있는가? 아니면 아벨처럼, 예수님처럼, 죽어도 멈추지 않는 중보기도를 하고 있는가?
하나님이 받으시는 예물은 단순히 물질의 정성이 아닙니다. 더 나은 예물, 더 나은 기도, 더 나은 감사입니다. 나를 위한 소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한 절규입니다. 이것이 증거가 되는 기도이며,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는 기도입니다.
중보기도는 결국 내 자녀를 위해 울고, 가정을 위해 울고, 영혼을 위해 피를 흘리며 호소하는 기도입니다. 그것은 내가 죽어도 멈추지 않고 땅에서 울리는 기도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도가 가문을 구원하고, 명문가문으로 세우며, 하나님의 역사를 일으킵니다.
이제는 질문해야 합니다.
당신의 기도는 여전히 자기 기도입니까, 아니면 핏소리로 호소하는 중보기도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