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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이기는

by coven21 2025. 7.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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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이기는 성전운동 

인생에는 피할 수 없는 광야가 있다. 누구나 한 번쯤은 지나가야 하는 그 거친 길. 이 길은 단순히 인내나 근성으로 이겨내는 곳이 아니다. 오히려 ‘성전’이 내 안에 세워질 때, 그때 비로소 광야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응답의 현장이 된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역시 어쩌면 광야를 지나고 있을지 모른다. 삶이 막막하고, 기도는 메말랐고, 응답은 멀게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분명히 말씀하신다. 성막을 세워라. 성전을 준비하라. 성령의 임재가 있는 그곳에서 모든 해답은 시작된다.

 

출애굽기 14장 1절부터 13절까지는 극적인 장면이다. 홍해 앞에 서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뒤에서는 애굽의 병거가 쫓아오고, 앞에는 넘을 수 없는 바다. 이건 흔히 인생에서 말하는 ‘사면초가’ 그 자체다. 도망갈 곳도 없고, 기대할 곳도 없다. 인간적 수단은 완전히 무력해진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성전이 어디에 임하는지’를 보여주셨다. 그 성전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의 임재 그 자체였다.

 

지금까지의 인류 역사는 계속해서 같은 문제를 반복하고 있다. 처음 문제는 에덴 사건이었다. "하나님을 믿지 말라"는 속임수였다. 그 말은 지금도 여전히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 삶 속에서 울려 퍼지고 있다. “네가 신이 될 수 있다.” “부처처럼, 초월한 인간처럼 살 수 있다.” 하지만 결과는 어땠는가? 죄가 들어왔고, 인간은 하나님과 단절되었고, 그 단절은 곧 절망과 고통의 시작이 되었다.

 

그 다음은 노아 시대의 네피림 사건이다. 귀신에게 잡힌 사람들이 나타났다. 고대의 전설, 신화, 영웅 이야기 속의 존재들. 겉으로 보면 영적 능력을 가진 존재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타락한 영들과 연합된 자들이었다. 이것이 진짜 멸망의 원인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상은 ‘성공’이라는 이름으로 사단의 방법을 반복하고 있다. 더 높이 올라가려 하고, 더 많이 가지려 하고, 더 강해지려 한다. 그 모든 시도는 결국 바벨탑으로 귀결된다. 하나님 없이 인간 스스로 하늘에 닿으려는 시도. 하지만 바벨탑은 무너졌다. 모든 인류의 교만이 무너진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셨다. 그 시작이 바로 ‘유월절’이었다. 피를 바른 날, 이스라엘은 해방되었다. 애굽의 노예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오순절이 왔다. 성령의 능력으로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 그리고 수장절이 있다. 보좌의 배경, 곧 하나님의 모든 자원이 우리 삶에 저장된다는 의미다.

 

이 모든 것을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였다. 성막을 만드는 것. 곧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장소. 그리고 이 개념은 곧 성전으로 발전하게 된다. 왜 성막과 성전이 중요할까? 그것은 단순히 예배의 장소가 아니라, 세계복음화를 위한 하나님의 전략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모세에게 이 성막을 보여주셨다. 그리고 요셉에게는 꿈으로 언약을 주셨다.이들은 모두 ‘내 안에 하나님의 성전이 임했다’는 체험을 했다.

 

 

광야를 이기는

기도는 단순한 행위가 아니다. 기도는 모든 것을 끌고 다니는 힘이다. 그래서 기도는 곧 성전이다. 내 안에 하나님의 성령이 임하고, 그분의 성전이 임하면,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다. 나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이 내 안에 계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임재는 다른 사람들과의 만남 속에서도 드러난다. 출애굽기 5장에서 모세는 바로 앞에 섰다. 그 앞에서도 하나님의 성전이 임한 것이다.

출애굽기 14장은 드디어 이스라엘이 세계복음화의 현장, 홍해 앞에 서는 장면이다. 모세는 그 앞에서 외친다. “두려워 말라.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싸우시리니, 너희는 가만히 있을지니라.” 이건 단순한 용기의 메시지가 아니다. 이건 성전이 임한 자의 확신이다. 하나님의 망대가 그의 내면에, 그의 공동체에, 그리고 어둠의 현장에 임한 것이다.

 

이 축복을 가지고 광야를 걷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할 것은 ‘성막운동’이다. 삶의 중심을 성막으로 바꾸는 것이다. 내가 거주하는 텐트가 아니라, 내가 모이는 회막이 아니라, 먼저 성막 중심으로 삶을 재편해야 한다. 광야의 길, 척박한 그 길 위에 성막이 있으면 그 자체가 길이 된다. 성막이 없으면 광야는 단지 고통이다. 하지만 성막이 있으면 그 고통은 훈련이 되고, 응답이 되고, 간증이 된다.

이 성막은 발전하여 성전이 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에게 세 가지 뜰을 준비하라고 하신다. 이는 단지 건축 양식이 아니다. 세계복음화를 위한 구조다. 영적문제를 치유하기 위한 전략이다. 그래서 우리는 금요일, 토요일, 일요일을 중심으로 예배 회복운동을 해야 한다. 이 시대는 묵상이 사라진 시대다. 하지만 성전은 묵상운동이다. 감추어진 진리를 찾고, 숨겨진 계획을 발견하는 곳이다. 교회를 왜 ‘교회’라고 부르는가? 그것은 단순한 건물이 아니다. 교회는 세계를 살리는 보좌의 망대다.

 

교회는 보좌의 여정을 안내하는 이정표다. 우리의 싸움은 단순히 성공을 향한 몸부림이 아니다. 진짜 싸움은 ‘나, 내 것, 우리’ 밖에 모르는 에덴동산적 사고방식, 네피림의 영향력, 바벨탑의 사고구조와 싸우는 것이다. 이 세 가지를 이기기 위해서는 유월절로 해방을 얻어야 하고, 오순절로 능력을 받아야 하며, 수장절로 참된 배경을 누려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성전으로 부르셨다. 당신 자신이 성전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당신이 가는 곳마다 성전이 세워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도, 세상은 경제 문제로 흔들린다. 유대인들이 장악한 미국 경제처럼, 영적 흐름은 경제 흐름과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와 ‘헌금’을 새롭게 회복해야 한다. 홍해를 건너기 위해서도, 요단강을 넘기 위해서도, 여리고를 무너뜨리기 위해서도, 언약궤 중심, 성막 중심이어야 했다.

 

연합군이 쳐들어왔을 때, 하나님은 전무후무한 응답을 주셨다. 갈렙은 아낙산지를 홀로 올라갔다. 그에게는 오직 언약 하나였다. 세상의 거대한 문제도 이길 수 있다. 전도가 안 되는 무능도 이길 수 있다. 이론이 아니라, 응답이 필요하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하면서 헌금을 회복해야 한다. 가장 정성스럽게 하나님 앞에 드릴 헌금을 준비하라. 미리미리 준비하라. 그래야 당신이 가는 곳마다 물질의 축복, 건강의 축복이 임할 것이다.

 

이제는 5000종족을 살릴 인재들이 일어날 때다. 다윗처럼 생을 걸고, 내 평생을 걸고 언약 앞에 서야 한다. 가난, 무능, 질병은 하나님의 언약 앞에서 완전히 무너진다. 이 응답이 지금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이제 우리는 진짜 중요한 지점에 서 있다. 광야를 지나며 성막 중심으로 사는 것, 이것이 단지 종교적 삶의 형식을 갖추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방식’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광야는 모든 것을 잃는 곳이다. 집도 없고, 직장도 없고,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은 ‘성막 중심의 삶’을 살았던 자들이었다. 문제는 우리가 아직도 바벨탑을 쌓고 있다는 것이다. 뭔가를 이루고 싶고, 내 이름을 내고 싶고, 성공하고 싶은 그 마음. 바로 그 자리에 성막을 세워야 한다. 내 이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이 드러나야 하고, 내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이 서야 한다.

모세는 출애굽 후 광야에서 백성들에게 가장 먼저 ‘성막 운동’을 시작하게 했다. 애굽을 떠났지만, 애굽의 시스템은 사람들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들을 변화시키는 첫 걸음이 ‘성막 중심의 삶’이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구름기둥을 보고, 저녁이 되면 불기둥을 보며 움직였다. 하나님이 인도하실 때 움직였고, 멈추실 때 멈췄다. 내 의지대로가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대로 살게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막 중심의 삶이다.

 

성막 중심의 삶이란 무엇인가? 단순히 주일만 예배드리는 것이 아니다. 일상의 모든 흐름을 성막 중심으로 바꾸는 것이다. 말 그대로 ‘내가 사는 장막’이 아닌 ‘하나님이 임재하시는 성막’을 기준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회막 중심으로 모이고, 말씀 중심으로 흐름을 맞추며, 기도 중심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 그때부터 ‘광야의 길’이 ‘응답의 길’로 바뀌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성전 운동’이다.

이 성막이 발전해서 결국 성전이 된다. 솔로몬이 성전을 지었을 때,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 찼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그 성전을 하나의 건물로만 인식하게 된다. 결국 하나님은 성전을 허물어버리신다. 왜냐하면 진짜 성전은 건물이 아니라 사람, 곧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만에 다시 세우리라”고 하셨을 때,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 말은 ‘내가 성전이다’라는 선언이었다. 그리고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 우리 안에 성령이 임하셨다. 그 순간부터, 내 몸이 곧 하나님의 성전이 된 것이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단 하나다. 내 안에 성전을 회복하는 것. 내 안에 성령이 다시 충만하게 임하시도록 기도하는 것. 그리고 내가 가는 곳마다, 성전의 기능이 시작되도록 준비하는 것. 가정이 성전이 되고, 직장이 성전이 되고, 심지어는 병원이 성전이 되고, 학교가 성전이 되는 것. 이것이 진짜 세계복음화의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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