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살로니가후서 1장 말씀은 박해 속에서도 믿음을 지키고 사랑을 실천한 데살로니가 교회를 향한 바울의 깊은 격려와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확신을 담고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엔 고난 가운데 있는 교회였지만, 그 속에서 자라고 있는 믿음과 풍성한 사랑은 그 자체로 하나님의 은혜의 열매였습니다. 바울은 그런 그들을 위하여 항상 감사하며 기도했다고 고백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삶은 단순한 생존이 아닌,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자로 여겨지기 위한 믿음의 행진이었기 때문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믿음은 더욱 자라나고, 박해 가운데서도 사랑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이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의 표”라고 표현합니다. 세상에서는 이해되지 않을 수 있는 이 고난이, 사실은 하나님의 정의가 드러나는 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라, 그 고난 속에서 우리의 믿음을 단련시키시고, 그 끝에 반드시 갚아주시는 분이십니다.
특히 “갚아주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는 이 본문에서 중심을 이룹니다. 바울은 환난을 받는 자들에게는 안식을, 환난을 주는 자들에게는 동일한 환난으로 갚으신다는 하나님의 공의를 강조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보복이나 심판의 메시지가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실현된다’는 믿음이며, 억울한 일을 당하는 자들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세상 속에서 우리가 겪는 억울함, 외면당함, 이해받지 못하는 순간들...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오늘날 우리도 신앙으로 인해 겪는 불이익이나 외로움이 있습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심지어 교회 안에서조차 마주하는 외로움과 상처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을 기억하시고, 우리를 위하여 갚아주십니다.
주님, 우리가 겪는 작은 고난도 주의 손에서 결코 헛되지 않음을 믿습니다. 외면당한 마음, 억울함 속에서 눈물 흘린 날들, 주님 앞에 올려드리오니, 하나님의 공의로 그것을 감싸 안아 주소서. 우리를 부르신 그 뜻에 합당한 자로 설 수 있도록 도우소서.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소서.
하나님께서는 단지 위로만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은 모든 상황을 뒤집으시며, 진리를 밝히 드러내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의 갚으심은 단순한 보상이 아니라, 우리를 부르신 목적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드시는 회복의 여정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11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이 말씀은 단지 과거의 기도가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에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부르신 이유,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때로는 원한도 갚아주시고, 억울함도 회복시키시며, 나로 하여금 전도와 복음의 길을 온전히 걸어가게 하십니다.
마가복음 3장과 1장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함께 있게 하시고” 전도하게 하시며 귀신을 내쫓는 권세를 주셨습니다. 이는 단지 사명을 주셨다는 의미 이상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있는 자’로 살아가기 위해 우리 삶의 무너졌던 부분들을 회복시키고, 걸림돌들을 제거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항상 함께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시기에, 우리의 사명을 방해하는 그 모든 요소들을 갚아주시며 정리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보처럼 사는 것이 아니라, 공의의 하나님을 믿으며 당당히 살아갈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에서 예수님은 “악한 자를 대적하지 말라”고 하시며, 오른편 뺨을 치는 자에게 왼편도 내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복수하지 말고 억울함을 삼키라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고 맡기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갚아주시기 때문에 우리는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끝까지 믿음을 지킬 수 있습니다.
주님, 우리가 억울함 속에서도 믿음을 놓지 않게 하소서. 공의의 하나님을 신뢰하며, 원수를 갚지 않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게 하소서. 내가 직접 정리하려 하지 않고, 주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허락하소서.
이처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모든 억울함과 원한을 갚아주신다는 것은 단지 과거의 고통에 대한 보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삶의 방향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부르심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하십니다. 바로 그 부르심의 이유가 “거룩함”이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장 3절에 “하나님의 뜻은 이것이니 곧 너희의 거룩함이라” 말씀하신 것처럼, 하나님은 우리를 단지 복을 주기 위해 부르신 것이 아니라,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위해 부르셨습니다. 거룩함은 단지 외적인 도덕이나 윤리 수준의 변화가 아니라, 우리의 존재 자체가 하나님의 뜻에 맞게 재창조되는 것을 말합니다.
히브리서 10장 14절은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라고 선언합니다. 하나님은 이미 우리를 거룩하게 만드셨고, 이제는 그 거룩함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이끄십니다. 사탄이 우리를 정죄하고 과거의 실수로 흔들리게 만들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옷’을 입히시고, ‘정한 관’을 씌워주십니다(스가랴 3장 3–5절). 이것은 단순히 용서의 메시지가 아니라, 새롭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절망하거나 낙심할 이유가 없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23절에서도 하나님은 “너희의 온 영과 혼과 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실 때에 흠 없이 보전되기를 원하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끝까지 믿음으로 서기를 원하시며, 또 그렇게 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바로 그 다음 절에서 바울은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라고 확신 있게 말합니다.
우리의 의지로는 끝까지 거룩함을 지킬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를 부르신 분, 공의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은 친히 이루어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기도할 수 있습니다.
주님, 나의 거룩함을 이루시는 하나님, 흔들리는 내 마음을 붙들어 주소서. 세상의 눈치를 보지 않게 하시고, 오직 주의 시선 앞에 정직하게 살게 하소서. 나의 의지로 감당할 수 없는 사명의 길 위에서, 주의 손이 나를 이끌어 가소서.
하나님은 역사의 흐름 속에서도 그분의 공의를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사울왕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지 않자, 하나님은 다윗을 세우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을 숭배하자, 하나님은 바벨론 포로 70년을 통해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마가다락방에서 시작된 교회는 이방인과의 문제로 촛대가 안디옥 교회로 옮겨졌습니다. 이 모든 사건은 하나님의 공의가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역사입니다.
사도행전 5장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사건도 마찬가지입니다. 빛의 경제, 선교의 통로로 부름받은 공동체 안에서도, 하나님은 정의를 세우십니다. 우리는 이것이 무섭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동시에 놀라운 위로가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함을 잃지 않도록 끝까지 보호하시고 지켜주신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편안함과 안락함을 추구하며, 때로는 복음의 길을 외면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공의의 하나님은 우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다시 세우시기 위해 일하십니다. 내가 잃어버린 시간, 외면했던 사명, 주저앉았던 자리에서 다시 일어날 수 있도록, 하나님은 모든 것을 동원하셔서 우리의 삶을 회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는 지혜를 구해야 합니다. 공의의 하나님을 의지하며, 문제에 매달리지 않고 문제를 통해 주시는 답을 찾는 삶, 갈등을 통해 갱신되는 삶을 꿈꿔야 합니다. 3집중(기도, 말씀, 전도), 3세팅(시간, 공간, 사람), 3응답(말씀, 기도, 현장)의 은혜 속으로 들어가는 삶 말입니다.
주님, 우리로 하여금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살게 하소서. 우리 삶의 작은 자리까지 기억하시고, 억울함도 환란도 공의로 갚아주시는 하나님을 신뢰하게 하소서. 편안함보다는 주의 뜻을 따르는 삶, 거룩함의 삶을 선택하는 지혜를 허락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