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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rning Point: From the Dead Sea to Living Waters

coven21 2025. 11. 28. 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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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에스겔 47장과 나의 전환점

하나님은 늘 말씀으로 길을 여신다. 성경 에스겔 47장을 보면 성전 문지방 아래에서 흘러나온 물이 점점 깊어져 결국 강이 되는 장면이 등장한다. 발목, 무릎, 허리, 그리고 결국 헤엄쳐야 할 강물이 되는 그 생명의 흐름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우리의 신앙 여정이 바로 그러하다.

 

처음에는 얕은 물에 발을 담그는 듯, 가벼운 말씀 묵상이나 형식적인 예배로 시작되지만, 어느 시점이 되면 그 강물은 우리를 압도하며 삶 전체를 삼키게 된다.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나는 지금 그 강물의 어디쯤 서 있는가? 발목인가, 무릎인가, 아니면 이미 헤엄치고 있는가?

 

하나님은 당신의 백성에게 단순한 물 한 컵이 아닌,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신다. 그것은 복음이다. 그리고 그 강물은 메마른 사해바다 같은 우리의 삶, 죽음의 기운이 가득한 현실 속에서도 다시 살아나게 한다. 마른 뼈들이 살아나는 것처럼, 언약을 붙잡고 생수의 강에 발을 담그는 순간부터 변화는 시작된다. 진짜 전환은 내가 뭔가를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게 아니다.

 

내가 '데리고 가심을 받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주체는 하나님이다. 방향도 하나님이 정하신다. 우리는 그 강물을 따라 걷기만 하면 된다.


■ 요셉처럼, 두 몫을 받는 축복의 응답

에브라임과 므낫세, 요셉의 두 아들은 이스라엘 열두 지파에 각기 포함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요셉은 장자의 권리를 회복했고, 갑절의 분깃을 받았다. 이건 단순한 성경 이야기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가 복음을 붙잡고 진짜 언약 속으로 들어간다면, 우리 인생에도 요셉처럼 '두 몫의 응답'이 반드시 주어진다. 당신이 만약 요셉처럼 억울한 시간을 보냈다면, 사람들이 당신을 구덩이에 던졌고, 잊혔고, 감옥에 가두었고, 말 한마디 없이 버림받았다면... 그렇다면 당신은 복수의 길이 아니라 응답의 길로 들어설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이다.

 

두 몫을 받는 사람은 반드시 한 지역, 한 영역을 장악하게 되어 있다. 그 사람은 단지 복음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의 공급자이며, 시스템을 바꾸는 리더로 세워진다. 다시 말해, 자신의 전공, 직업, 사명, 삶의 모든 영역에서 ‘전문성 300%’를 갖춘 사람이 되는 것이다. 전문성은 성령의 능력을 통과한 기도가 깃든 노력과 시간의 결정체다. 아무리 탁월해 보여도, 복음 없이 노력한 전문성은 그저 도구에 불과하다. 반대로, 복음 속에서 갈고닦은 전문성은 ‘사명을 이루는 도끼’가 된다. 사람을 살리고, 현장을 바꾸며, 한 민족을 살리는 촉매가 된다.


■ 특별새벽기도, 나의 진짜 전환점

어떤 사람에게는 금요일이 전환점이다. 누군가는 어떤 만남, 책 한 권, 인생의 위기 혹은 병상에서의 고백이 전환점이 되기도 한다. 내게는 '특별새벽기도'가 그랬다. 단순히 더 일찍 일어나고 교회에 나간다는 의미가 아니다. 이건 싸움이다. 나 자신과의 싸움, 무기력과 타협하려는 나, 하나님보다 현실을 앞세우려는 나, 믿음 없이 기도하는 나를 깨부수는 영적 전투였다. 그 새벽, 반복되는 기도문 속에서 나는 ‘하나님이 나를 데리고 가신다’는 말의 진짜 무게를 느꼈다. 나는 걷는 자가 아니다. 이끄심을 받는 자였다.

 

그날 이후로 내 인생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다. 이전에는 일터와 삶이 사해바다 같았다. 아무리 흘려보내도 죽은 바다, 아무 생명도 자라지 않는 건조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씩 다르다. 내가 가는 곳마다, 말하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 속에서 생명의 기운이 피어나는 것을 느낀다. 이것이 곧 '전도의 흐름'이요, 복음의 생수다. 이제 나는 입으로 전도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으로 복음을 드러내는 증인으로 살아가려 한다.

 


건너뛰어야 산다 – 율법, 종교, 염려, 원망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말씀하셨다. “그 사람을 데리고 건너가게 하시니…” 그 장면은 마치 오늘 우리를 향한 명령처럼 들린다. 이제는 건너야 한다. 발목에만 머무르던 신앙을 뛰어넘어야 한다. 무기력한 반복기도, 감정 없는 예배, 의미를 잃은 성경 통독에서 건너뛰어야 한다. 내가 만든 종교적 틀을 넘어야 한다. 불신앙, 염려, 원망, 비교, 열등감, 이 모든 것들이 우리가 매일 붙잡고 있는 수갑이다. 그러나 생수의 강은 수갑을 녹인다. 믿음으로 한 걸음만 더 디뎌보라. 생명력이 살아날 것이다.

 

은혜는 가만히 있는 자에게 임하는 것이 아니다. 무너진 자리에서도 복음을 외치는 자에게 임한다. 내가 무너졌다는 고백이 선포되는 그 순간, 하나님은 다시 나를 세우신다. 나의 실수, 연약함, 실패, 실패한 과거가 오히려 하나님을 드러내는 '배경'이 된다. 그렇기에 우리는 사해바다 같은 인생으로 끝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계시가 담긴 바다로 회복된다.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죽은 물고기도 살아나고, 말라버린 나무도 열매를 맺게 된다.


■ 오직 복음, 오직 언약 – 복음경제의 회복

복음은 살아있다. 그리고 복음은 경제도 살린다. 하나님이 가난한 자를 축복하시는 방식은 단지 돈을 주는 방식이 아니다. 복음경제의 핵심은 '잘 쓰는 사람이 부자다'라는 통찰이다. 록펠러가 그랬다. 그는 한때 한계를 느꼈고, 인생의 방향을 바꾸었다. 돈을 쌓는 것이 아니라, 흘려보내는 그릇이 되기로 결단했다. 후대와 복음을 위해 대학을 세우고, 교회를 세우는 사명을 붙잡았다. 이건 단순한 기부가 아니다. 복음경제의 회복이다.

 

당신이 만약 지금 경제적으로 고통스럽다면, 다시 질문해보라. 나는 돈을 어떻게 쓰고 있는가? 복음을 위해 쓰고 있는가? 하나님의 언약을 위해 쓰고 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나를 어디로 데리고 가고 계신가? 복음은 생명이고, 생명은 반드시 살아나게 되어 있다. 당신의 지갑도, 직장도, 사업도 복음으로 들어가면 살아난다. 복음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모든 것을 살아나게 하는 생수의 강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회복해야 할 ‘절대망대’의 비전이다.

 


■ 나는 증인이 되리라 – 사해를 살리는 자

무엇을 하겠다는 결심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건 정체성이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은 오늘도 내게 말씀하신다. “너는 증인이 되리라.” 증인은 말한다. 증인은 경험한다. 증인은 보았고, 들었고, 확인했기 때문에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도 나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일이 아니라, 더 깊은 깨달음이다. 말씀이 성취되고, 기도가 응답되고, 복음이 나를 통해 흘러가는 증거가 내 삶에서 드러나야 한다.

 

내가 살아야 한다. 그래야 사해바다를 살릴 수 있다. 내가 먼저 살아나야 가정이 살고, 내가 먼저 살아야 지역이 살아난다. 이 복된 성례주일, 나에게도 전환점이 일어날 줄 믿는다. 요셉에게 두 몫을 주셨던 그 하나님이 내게도 그 몫을 주실 것이다. 그리고 나는, 하나님이 세우신 그 지역의 절대망대로, 복음의 통로로, 생수의 강을 흘려보내는 자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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